| 영화 '신세계' 공식 포스터 |
나를 사람으로 대해준 쪽과, 나를 쓰는 쪽
오래 곁을 지켜준 사람과 내가 속한 조직,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머리로는 답이 정해진 것 같은데 막상 그 자리에 서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질문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작품은 이 질문을 두 시간 넘게 끌고 가다가, 관객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답을 내놓고 막을 내립니다.
저는 이 영화를 개봉 당시 극장에서 봤습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를 쓰고 있는 삼십 대 이지만, 그때는 의무경찰로 복무 중인 스물셋이었습니다. 휴가를 나와 가족들과 함께 표를 끊었고, 상영관 불이 꺼질 때만 해도 이 작품이 이렇게 오래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필 경찰 신분으로 복무하던 시기에 위장 잠입 경찰이 주인공인 영화를 봤다는 게, 지금 돌아보면 묘한 우연처럼 느껴집니다.
극장을 나오며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문장은 단순했습니다. 역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느와르구나. 그 첫인상은 십수 년이 흐른 지금까지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좁은 철제 상자 안에서 완성된 인물
「신세계」는 박훈정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함께 맡아 2013년 2월 21일에 선보인 134분짜리 범죄 드라마입니다. 이정재가 잠입 경찰 이자성을, 황정민이 조직의 실세 정청을, 최민식이 이자성을 관리하는 강과장을 연기했고 박성웅과 송지효가 무게를 더했습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최종 468만여 명을 동원했으며, 황정민은 이 작품으로 제34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기록에 남은 숫자보다 제 안에 더 선명하게 박힌 것은 엘리베이터 장면입니다. 좁은 철제 상자 안에서 정청이 여러 명을 홀로 상대하고, 문이 열릴 때 상대를 향해 들어오라고 부르는 그 짧은 대사. 저는 그 순간 상영관 공기가 한 번 출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섭다기보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지는데, 웃고 나면 곧바로 서늘해지는 이상한 감각이었습니다.
이 대목이 지금까지 짧은 영상으로 끝없이 재생되는 이유도 거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액션이어서가 아니라, 정청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대사 한 줄과 표정 하나로 전부 설명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그 여유가 곧 공포라는 사실을 배우가 몸으로 증명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회자되는 장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저는 이 작품에서 배웠습니다.
그때 제가 끝내 납득하지 못했던 것
솔직히 고백하면, 상영관을 나설 때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이자성은 경찰입니다. 조직을 무너뜨리려고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저렇게 흔들리는가. 왜 정청과 경찰 사이에서 저토록 오래 저울질을 하는가. 이십 대 초반이던 저는 그 갈등이 잘 소화되지 않았습니다. 경찰이면 경찰답게 해야지, 하는 생각이 앞섰던 겁니다.
시간이 지나 다시 곱씹어보니 영화가 왜 그 길을 택했는지는 보이더군요. 이자성이 조직 안에서 보낸 세월은 짧지 않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정청은 그를 형제처럼 대했습니다. 반대로 그를 그 자리에 밀어 넣은 강과장은 어땠습니까. 위험에 빠져도 임무가 먼저였고, 사람보다 성과가 먼저였습니다. 국가는 그를 소모품처럼 다루는데, 무너뜨려야 할 상대는 그를 사람으로 대해줍니다. 애초 목표는 조직을 겨누는 것이었지만 저렇게까지 잘해주면 마음이 기울 만도 하겠구나 싶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어느 쪽이 나를 사람 취급해주는가에 관한 이야기였던 셈입니다. 스물셋의 제가 보지 못했던 층이 거기 있었습니다.
다만 이해와 동의는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결말을 언급하니,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이 대목을 건너뛰고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이자성은 경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는 조직의 정점에 앉습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신세계'는 그가 직접 열어젖힌 세계입니다. 이 마무리를 통쾌하게 받아들이는 관객도 많더군요. 자신을 도구로만 쓰던 조직에 대한 통렬한 응답으로 읽는 해석에도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아무리 이용당했다고 느꼈어도, 경찰이 조직의 수장 자리로 걸어 들어가는 선택은 아니라고 봅니다. 몸담은 곳이 부당했다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길도 있었습니다. 사표를 내고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오는 대신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었다기보다, 손에 쥐어진 권력을 끝내 놓지 못한 결과에 가깝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경찰이라는 자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개인의 억울함을 푸는 데 있지 않습니다. 치안을 바로 세우려면 목표를 정하고 임무를 끝까지 매듭짓는 편이 맞습니다. 그것이 결국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방향이니까요. 물론 영화가 그런 반듯한 결말을 골랐다면 이만큼 오래 이야깃거리로 남지는 않았을 겁니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기에 지금까지 논쟁이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작품의 힘은 인정하되, 이자성의 마지막 선택에 박수를 보내지는 않겠습니다.
가족들과 나란히 앉아 본 밤
아쉬웠던 점을 굳이 꼽자면 하나 있습니다. 가족과 나란히 앉아 보기에는 폭력 묘사의 수위가 제법 높았습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옆자리에 부모님이 계신 상태에서 몇몇 장면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애매했습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날의 감상입니다. 나이를 먹고 다시 헤아려보니 그 정도 수위는 이 장르가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데 필요한 무게였습니다. 지금은 과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상영이 끝나고 나온 가족들 반응은 한결같았습니다. 모두 재미있었다고 했고, 특히 배우들의 연기를 두고 명연기라며 아끼지 않고 칭찬했습니다. 취향이 제각각인 가족이 한 작품 앞에서 이견 없이 같은 평가를 내리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 만장일치가 이 영화의 완성도를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 배우들의 연기 대결만으로 두 시간이 채워지는 작품을 찾는 분
✔ 결말을 두고 오래 토론할 만한 영화를 원하는 분
✔ 짧은 영상으로만 봤던 그 대사의 앞뒤 맥락이 궁금한 분
제가 이 작품을 지금 꺼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신세계」는 대한민국 느와르에 한 획을 그은 대표작이고, 그 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단단해지고 있습니다. 저처럼 결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아니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붙들고 생각하게 되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습니다. 이자성의 자리에 서 있었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 문을 여셨을까요. 저는 망설임 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쪽이라 답하겠습니다. 다만 그 답을 이자성만큼 오래, 그리고 혹독하게 시험받아 본 적이 없다는 것도 함께 적어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