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모] 국내에선 12%였는데 넷플릭스 세계 4위와 국제 에미상까지 받은 박은빈 드라마

드라마 연모 공식포스터

 

왕좌 위에 앉은 세자가 혼자 남은 전각에서 관모를 벗습니다.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이 촛불에 일렁이는 그 순간, 화면 밖에서 지켜보는 저도 숨을 참게 됐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왕좌에 앉아야 했던 한 사람이 하루를 버텨낸 뒤 유일하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시간. 그 장면 하나가 이 작품의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홍대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로빈입니다. 2022년 11월, 포털 뉴스 목록을 훑다가 "한국 드라마 최초 국제 에미상 수상"이라는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작품 이름이 「연모」였는데, 방영 당시 저는 이 작품을 그냥 지나쳤던 터라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작품을 안 봤다니" 하는 생각에 그날 저녁 바로 넷플릭스에서 1화를 틀었습니다. 이후 약 일주일에 걸쳐 20회를 완주했고, 왜 이 작품이 해외에서 그토록 뜨거운 반응을 얻었는지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연모」는 2021년 10월부터 12월까지 KBS2 월화드라마로 방영된 전 20회의 퓨전 사극입니다. 송현욱 연출, 한희정 극본으로 이소영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삼았고, 박은빈, 로운, 남윤수, 최병찬, 배윤경, 정채연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닐슨코리아 기준 초반 5~6%대에서 출발해 후반부에 10%를 넘기며 최고 시청률 12.1%를 기록했는데, 이 수치만 보면 평범한 중박 정도의 성적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사극으로는 처음으로 넷플릭스 글로벌 비영어 시리즈 부문 4위에 올랐고, 이듬해 제50회 국제 에미상 텔레노벨라 부문에서 한국 드라마 최초로 수상하며 국내 시청률과 해외 평가 사이의 격차가 가장 두드러진 작품이 됐습니다.

왕관 아래 감춘 정체: 박은빈이 만든 이중의 표정

사극에서 남장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은 이전에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박은빈의 이휘는 그 계보에서 한 단계 다른 위치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보통 남장 여자 캐릭터는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서사 비중이 쏠리는데, 이휘는 이미 오랜 세월 남장을 해왔기에 들킬 걱정보다 자기 자신을 잊어가는 쪽에 무게가 실립니다. 그래서 박은빈의 연기가 더 복잡해지는 겁니다. 세자로서의 단호함, 여자로서의 불안, 연인 앞에서의 떨림이 한 얼굴 위에서 미세하게 교차하는데, 그 전환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감탄이 나왔습니다.

여자친구에게 "나 「연모」 안 봤어"라고 했더니 "그걸 이제야 봐?"라며 놀라더군요. 여자친구는 방영 당시 본방으로 챙겨 봤던 터라 나름 앞서가는 시청자였는데, 저에게 한 가지 예언을 했습니다. "3화 넘기면 박은빈이 진짜 세자로 보이기 시작할 거야." 정확한 말이었습니다. 초반에는 배우의 얼굴이 먼저 보이는데, 중반부터는 이휘라는 인물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대비마마(이일화) 앞에서 잠깐 여자 아이의 표정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게스트하우스에서 혼자 보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납니다.

사제에서 연인으로: 이휘와 지운의 감정선

로운이라는 배우에 대해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걱정이 있었습니다. 아이돌 출신이 사극 남자 주인공을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편견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그런데 로운이 연기한 정지운은 그 걱정을 깔끔하게 걷어 냈습니다. 말수가 적지만 시선 하나로 감정을 전달하는 인물인데, 로운의 차분한 분위기가 이 역할과 잘 맞았습니다. 특히 세자가 남자임을 알면서도 마음이 기울어지는 과정을 표현할 때, 혼란스럽되 추하지 않은 감정선을 유지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가르침"이라는 명분 아래 쌓이는 감정입니다. 스승과 제자라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설정을 만들어 주고, 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장면에서 손끝이 스치는 순간이 사극의 절제된 감성과 잘 어울렸습니다. 여자친구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요즘 로맨스 드라마는 감정 전개가 너무 빠른 게 문제인데, 이 작품은 조선이라는 시대 배경 덕분에 설렘을 천천히 쌓아 올린다"는 여자친구의 평가에 저도 동의했습니다. 다만 후반부에서 정치적 갈등이 로맨스 비중을 압축시키면서 두 사람의 감정이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점은 아쉬웠습니다. 18회 이후로 서사가 빠르게 수렴하면서 "이 둘의 이야기를 조금 더 보고 싶다"는 갈증이 남았거든요.

궁 안의 권력 다툼: 사극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

「연모」를 단순한 궁중 로맨스로만 분류하기 어려운 이유는 정치극의 비중이 생각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이휘를 둘러싼 권력 구도가 겹겹이 쌓여 있는데, 숙부 창운군과 계모 중전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왕좌를 위협하는 구조가 꽤 촘촘합니다. 특히 중전이 혜종과 이휘 사이를 이간질하는 장면에서는 로맨스와 전혀 다른 결의 긴장감이 흐르는데, 이 두 가지 톤이 한 작품 안에서 공존한다는 것이 의외로 자연스러웠습니다.

저는 평소에 웹툰 중에서도 시대극이나 궁중 미스터리물을 즐기는 편인데, 그 관점에서 「연모」의 궁중 정치는 합격점이었습니다. 물론 본격 정치극인 「육룡이 나르샤」나 「뿌리깊은 나무」에 비하면 정치적 깊이가 얕다는 평가도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정치 자체가 아니라 "정체를 숨긴 왕이 정치라는 파도 위에서 어떻게 버티는가"에 있고, 그 균형은 잘 잡혔다고 생각합니다. 호위무사 김가온(최병찬)의 존재가 중반부에 미스터리 요소를 더해 주는 것도 서사의 밀도를 높이는 데 한몫했습니다.

국내 12%와 세계 4위 사이: 이 격차는 어디서 왔을까

이 작품을 보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왜 국내에서는 최고 12.1%에 그쳤는데 해외에서는 사극 최초로 넷플릭스 글로벌 4위까지 올랐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방영 당시 인도네시아, 일본, 필리핀, 태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5위권 안에 들었다는 기록을 보면 해외 시청자들의 반응은 분명히 뜨거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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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 여자 서사의 보편성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인물의 이야기는 문화권을 넘어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부터 일본 만화의 남장 여자 캐릭터까지, 이 소재는 어느 나라 시청자에게든 낯설지 않은 이야기 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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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영상미와 의상

한국 사극 특유의 궁중 미술과 한복 의상은 해외 시청자들에게 시각적 매력으로 다가갑니다.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던 프랑스 출신 게스트가 떠나기 전에 "The King's Affection 알아?"라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제가 뭔지 몰라서 대답을 못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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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동시 공개의 힘

KBS 본방과 같은 날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 공개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국내 시청자에게는 KBS 월화 편성이라는 제한된 시간대가 걸림돌이 될 수 있었지만, 해외 시청자에게는 넷플릭스라는 접근성 좋은 창구가 열려 있었던 셈입니다.

결국 이 작품은 국내 시청률만으로 평가하면 "괜찮은 사극" 정도이지만, 글로벌 반응과 국제 에미상 수상까지 포함하면 2021년 하반기 한국 드라마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작품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원작 만화와 드라마 사이: 무엇이 달라졌나

웹툰과 만화를 꾸준히 읽는 독자로서, 원작이 있는 드라마를 볼 때는 자연스럽게 비교를 하게 됩니다. 이소영 작가의 원작 만화 「연모」는 로맨스에 좀 더 무게가 실린 작품인데, 드라마는 궁중 정치와 이휘의 내면 갈등을 상당히 확장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드라마의 선택이 더 나았다고 느꼈습니다. 만화의 로맨스 중심 구조로 20회를 채웠다면 중반에 늘어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정치적 긴장감이 서사의 추진력을 유지해 주었거든요.

다만 원작에서 더 풍성했던 조연 캐릭터들의 서사가 드라마에서는 다소 축소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특히 신소은(배윤경)과 노하경(정채연)의 이야기가 후반으로 갈수록 주인공 서사에 흡수되어 버리는데, 이 인물들에게 독립적인 서사 공간이 조금 더 주어졌다면 작품의 완성도가 한 단계 올라갔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연모가 남긴 한 가지 질문

이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며칠 동안 생각난 것은 "자기 자신을 숨기며 사는 것의 무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휘는 여자라는 정체를 숨기고 세자로 살아야 했고, 그 비밀이 곧 자신의 생사와 직결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저의 일상은 이휘처럼 극적이지 않지만,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손님 앞에서는 항상 밝고 친절한 호스트여야 한다는 것이 때로는 작은 무게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피곤한 날에도,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는 날에도 문을 열고 "어서 오세요" 하며 웃어야 하니까요.

「연모」는 그런 일상적인 감정에 사극의 옷을 입혀 보여 준 작품이었습니다. 국내에서 12%라는 시청률이 이 작품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은, 국제 에미상이라는 결과가 증명해 주었습니다. 박은빈이라는 배우의 섬세한 연기, 조선 궁중이라는 아름다운 배경, 그리고 감추어야만 하는 사랑이라는 보편적 서사가 세 박자를 맞춘 작품. 늦게 봤지만 늦게라도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몇 안 되는 사극이었습니다.